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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의식 서술형 개소리 1 241008 화

쟉트 2024. 10. 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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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를 보러 성남에 왔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은지 오면서 계속 생각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
그게 뭘까?
그리고 저 명제는 참인가?
그에 나는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렸다.
내가 진짜 라는 것과 그 하고 싶은 것이 단수라는 것은 아닌 것 같단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냥 새로운 걸 배우고 그걸로 돈을 벌고 새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너무 좋다.
그것에서 진짜 강한 희열을 느낀다.
행복하지 않나?
나는 행복하던데.
하지만 이게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좋은 방법이라는 기준은 내가 아닌 사회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가 낮은 가를 기준으로 봐야겠지만.
계속해서 질리지 않고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일에서 질리지 않을 수 있을까는 늘 고민이 된다.
내가 늘 원해왔던 건 무엇일까. 그리고 그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개의 견체와 걸음걸이 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띈다.
그리고 내가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건 영원히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게는 끝이 없을 것 같다.
늘 새로운 건 신기하고 행복하고 짜릿해.
늙어갈 때 내 인생의 황혼일 때 내가 그 때는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도 ... 사실 상상은 잘 안된다.
논문을 읽는 일상일까?
책을 읽어 내려가는 일상일까?
아니면 사람을 만나서 마주하는 일상일까?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상일까?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게 아직 행복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과 해보지 못한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거니까.
내가 듣지 못한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는 것도 좋다.
아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이야기를 듣는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듣는 건 날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듣게되는 이야기. 그런 걸 나는 너무나 좋아한다. 역사도 늘 내 취향이었고 말이다.
내가 역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엄청나게 거창한 꿈이지만,
어쩌면 나는 내가 어릴적 읽은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책을 쓰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싶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게 내가 하는 행위의 목표가 아닌,
그것이 부차적으로 따라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면 좋겠다. 그렇다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하다.
강아지들이 있는 곳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행복하다. 그냥 나는 좀 많이 ... 행복하게 느껴진다.
내가 배우지 못한 이야기들 내가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계속 듣고 싶다.
공부만하는 건 지겨우니 일도 하고 싶다.
한 가지 일에는 그 일을 최대한 잘게 쪼갰다는 가정하에 3시간이 최대로 집중 가능하다.
진짜 이것도 웃긴 거 같다.
어떻게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는게 하루 3시간인거지?
나는 현대에 살아남기 적합한 개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아는 언니와 그런 논쟁을 한 적도 있었다.
진화론을 근거로 생각해봤을 때, 지금까지 살아남은 (혹은 번식해서 자손을 남기기에 성공한) 사람 유전자는 걱정이나 불안이 없는 쪽으로 분명 진화했을 거라고 언니가 주장했었다.
왜냐하면 숨쉬는 순간마다 죽기 아니면 살기 이렇게 fight and flight 를 결정하는 방식은 한 인간 개게에게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난 예전에 내 불안을 이런 식으로 언니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말이다.
그런 예민하면서도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되는 객체는 후대에 계속 자손을 남기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혹은 빨리 죽었을 테니 자손을 남기기가 어려웠을 듯) 했다.
그러니 언니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너의 불안은 어쩌면 니가 통제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고, 이런 뉘앙스의 얘기였다. 물론 내가 적어놓은 문장보다 훨씬 사회인의 매너를 가주고 배려하며 풀어서 얘기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개복치처럼 머리가 약한 내가 고통스러웠던 일로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언니는 나를 사람과 한 인격체로 존중해주고 말해줬음에 틀림없다.

언니의 호의와 논리와 주장에 나도 생각을 해보았다.
나의 불안감은 통제 가능한 것인가.
정확히는
나의 불안감은 약물 없이 내 자력으로 통제 가능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때 바로 튀어나온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렇지 않다.
이십팔년 넘게 살아왔지만, 내 불안이 내 통제하에 있었던 적은 기억에 없다.